관계

조회 수 13885 추천 수 0 2011.12.01 19:15:10


관 계 - 안도현 


톡, 하고 소리를 내며 도토리 하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갈참나무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진다는것, 그것은 도토리의 
새로운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너무 캄캄한데...." 도토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아주 가까운곳에서 귀에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 질거야." 누구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봄여름내내 도토리와함께 갈참나무에 매달려있던 
나뭇잎의 목소리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뭇가지에서 보이지 
않더니 나뭇잎은 어느새 낙엽이 되어 도토리보다 먼저 땅에 
내려와 있었던 것입니다. "도토리야 춥지?" "응, 조금." 
"우리가 이불이 되어줄께." 낙엽들이 도토리를 둘러 쌌습니다. 

낙엽속에 파묻힌채 도토리는 얼마를 보냈는지 모릅니다. 
도토리는 문득 눈앞이 환하게 밝아오는것을 느꼈습니다. 
수없는 낙엽들이 자신을 몇겹으로 둘러싸고 있는것도 보였습니다.

위에도...밑에도..낙엽이었습니다. 

도토리는 마치 강보에 싸인 귀여운 아기 같았습니다. 
참 고마운 낙엽들이었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에는 
사나운 비와 바람을 막아주더니 땅에 떨어진뒤에도 도토리를 
이렇게 따뜻하게 껴안아 주는 낙엽들... 

도토리는 가슴이 찡해져서 그만 눈물이 핑 돌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낙엽들에게 신세만 지고 살았어." 
도토리는 몸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래, 나도 낙엽들을 위해 무엇인지 할수 있는일이 있을거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하지만 도토리는 꼼짝도 할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단단한 껍질이 도토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토리가 말했습니다. 
"이 껍질을 깨고 어서 밖으로 나가고 싶어." 
이말을 들은 낙엽들이 말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 
그건 벽이 아니야. 그건 또 하나의 너 자신일 뿐이야." 

도토리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나"의 바깥에 또 다른 "나"가 있다니!...... 
도토리는 이사실을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벼운 흥분이 그의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또 다른 "나"가 힘을 합한다면!....그렇게만 된다면 
낙엽들을 위해 도토리도.......자신감이 생겨났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어." 도토리는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괜찮아, 도토리야. 너는 그보다 너 자신을 
잘 지켜야해. 그게 우리를 위하는 길이야." 

낙엽 하나가 이렇게 말하자, '걱정 하지마. 우리가 너를 
지켜줄께" 하고 다른 낙엽이 도토리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도 다른 낙엽이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도토리, 너는 우리의 꿈이거든." 하고 도토리의 등을 
감쌌습니다. 

낙엽들이 이렇게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할때는 
온 산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톡,..톡톡..하고 소리를 내며 
도토리들이 떨어지더니 톡톡토독,..토토토토토토톡토토토토톡톡톡 
토토토토톡톡토토톡....갑자기 소나기빗방울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도토리들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한노인이 와서 장대를 휘두르며 갈참나무의 도토리를 마구 털어내고 
있었습니다. 
한바탕 장대를 휘두른다음 노인은 가지고온 자루에다 도토리들을 
주워 담았습니다. 낙엽들은 그들이 감싸고 있는 도토리가 
노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낙엽들은 노인이 어서 산을 내려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홀쭉한 노인의 자루는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금새 빵빵해졌고,
노인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갔습니다. 
찍,..찍찍,...날이 어두워지자 이번에는 쥐들이 먹이를 찾아 
찍찍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찍찍찌찌찌찌직찍찍찍찌직찍찍찍찍찍 
찍찍찍찍찍찍.....낙엽들은 그들이 감싸고 있는 도토리가 
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위해 또 무진애를 썼습니다. 

도토리도 들키지 않으려고 땅으로 고개를 숙인채 쥐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굳이 이렇게 숨어서 살아야하나?" 도토리는 갑갑해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야, 너 자신을 포기 해서는 안돼." 
낙엽들이 당호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지긋지긋한 삶을 도토리는 견딜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있는 낙엽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존재를 되는대로 내팽개치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인긴의 눈에 발견되어 마을로 가거나, 

쥐들의 먹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된다면 하루하루를 
긴장과 불안에 휩싸여 살지 않아도 되잖아." 
"도토리야, 너는 살아 남아야해. 그래서 이세상하고 관계를 
맺어야해." ".....

관계를 맺는다는게 뭐지?" 

"그건 마음속에 오래 품고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너는 너 자신의 꿈뿐만 아니라, 우리 낙엽들의 꿈 까지도 
실현시켜야할 소중한 존재라는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에게 너무 많은걸 기대하고 있는건 아닐까? 미안하지만, 
나는 꿈 같은것은 없어. 어서 이 지루한 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밖에는..." 
낙엽들이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토리를 에워쌌습니다.
"도토리야, 네 몸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니?" 
"글쎄." 낙엽들이 바스락 거리며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그것은 도토리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내 몸 속에 갈참나무가?" "그래, 그래." 

낙엽들이 하는말을 도토리는 정말 믿기 어려웠습니다, 
도토리는 그냥 도토리일 뿐인데 어떻게 몸속에 큰 갈참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말인가?....

겨울이 되었습니다. 

앙상한 갈참나무 가지 사이로 흰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한두송이 띄엄띄엄 내리던 눈은 마침내 폭설로 변해 
온세상을 뒤 덮으려는 듯이 퍼부어댔습니다. 

힘없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뚝,뚝,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도토리를 감싸고 있는 낙엽 위에도 
눈은 내려 쌓이고, 쌓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눈이 내려 쌓일수록 도토리는 
몸이 자꾸 아늑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달콤한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면 또 다시 달콤하고 따뜻한 잠이 그를 불러 들였습니다. 

도토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낙엽위에 쌓였던 눈이 사르륵사르륵 녹는 소리가 났습니다. 
도토리의 몸도 눈 녹운 물에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도토리는 거무튀튀해진 낙엽들이 썩는 냄새를 맡고는 
마음이 울적해졌습니다. 

"나는 낙엽들을 위해 아무일도 한 게 없어, 낙엽들이 썩어
가는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야. 어서 꿈에서 깨어 나야지. 
그리고 무엇인가를 해야지." 

"도토리야,우리들 걱정은 하지않아도 돼. 네가 옆에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걸." 

낙엽들이 도토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기운이 도토리의 몸을 감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도토리의 작은몸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점점 뜨거워졌고 
참을수 없는 고통이 도토리를 집어 삼킬듯 하였습니다. 

도토리는 한시바삐 꿈속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꿈이지만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견뎌야 해, 이제 우리들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거야." 낙엽들이 마지막 남은힘을 다해 
도토리를 껴안았습니다.

이미 부서진 가루가된 낙엽들 까지도 도토리를 껴안았습니다. 
도토리도 이를 악물었습니다. 
낙엽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수는 없었습니다. 

도토리는 자신의 단단한 껍질을 찢으며 껍질밖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고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고는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갈참나무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질 때와는 전혀 다른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도토리는 생각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생생한 현실이었습니다. 
도토리는 햇볕이 내려오는 쪽으로 힘껏 손을 뻗었습니다. 
그랬더니 도토리의 손끝에 연초록 싹들이 보란듯이 돋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예쁜 연초록,.. 
그것은 바로 낙엽들의 꿈이었으며 또한 도토리의 꿈이었습니다. 

 
- 어른을 위한 동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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